"2024년 3월 15일 VC 업계에 위기가 찾아온다?"..심사역으로서 쓰는 마지막 글
꿈에 그리던 VC 심사역이 되었지만 현실은 제 생각과 많이 달랐습니다. 정말 많은 고민 끝에 눈물을 머금고 이 업계를 떠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글은 제가 VC를 떠나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와 향후 거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산운용사를 떠나 VC에 온 지 어느덧 2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는데 처음 회사를 설립하면서 생각했던 꿈들을 실현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기만 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회고록을 쓰게 된 이유는 이 회사를 떠나는 저의 여정을 돌아보고 공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업계와 회사에서 보낸 시간은 제게 소중하고 뜻깊었습니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제 경력과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 곳에서의 모든 순간에 감사하고 존경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번 글에서는 꿈만 같았던 VC에서의 시간들을 정리하며 정말 애정을 가지고 일했던 이 업계를 떠나게 된 계기와 제 향후 거취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참고로 아래의 이야기들은 순전히 제 개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제 글에 업계에 관한 부정적인 비판들이 많이 녹아있었는데 이 또한 한때나마 이 일에 진심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VC 업계 2년의 시간을 정리하며
VC에 있었던 2년의 시간이 저에게 주는 의미를 다시 한 번 돌아보자면 이 시간들은 배움과 존경의 연속이었습니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단순히 투자 업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산업의 최신 기술과 창업 생태계에 있는 뛰어난 분들과 대화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각종 산업에 대한 지식을 넓히고, 성장 가능성이 높은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투자하는 과정에서 창업자 분들께 많은 것들을 끊임없이 배웠습니다. 인생을 걸고 회사를 설립하여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그들에게 느낀 부러움 또는 존경심은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힘들 때마다 떠올리면 좋을 훌륭한 자극제가 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또 좋았던 것은 뛰어난 동료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이 일을 안 했으면 만날 수 없었을 뛰어난 분들과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배울 수 있었고, 제 약점을 보완하여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얻은 인연은 이후 제 삶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희망찬 시작과 냉혹한 현실
저는 여의도에 있는 작은 창업투자회사의 공동 창업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전 직장에서 사수로 있던 분과 나와 법인 설립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업무를 해 왔습니다. 법인 설립 초기 사무실 임대, 내부 인테리어, 직원 채용, 전략 기획 등의 많은 일들을 하면서 설레기도 하고 뭔가 잘될 것 같은 느낌으로 희망찬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회사를 운영하며 자본금을 늘리기 위해 유상증자를 통해 다른 주주를 받으면서 -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지만 - 무언가를 빼앗기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고 믿었던 직원이 퇴사를 하면서 힘들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다양한 경험과 함께 오만가지 감정을 겪게 만든 이 회사를 떠나기로 결정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회사 이름 뒤에 파트너스를 붙일지 인베스트먼트를 붙일지 고민하던 시간 만큼이나 오래 걸린 것 같습니다. 😐)
막상 시작하고 보니 많은 상황과 환경이 순조롭지만은 않았습니다. 제가 부족해서 그렇겠지만 정말 다양하게 일어나는 정신적으로 지치는 상황들은 항상 예상치 못하게 발생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더욱 강한 의지와 인내심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스토리를 잘 그려냈다면 훗날 매일경제 같은 언론사 인터뷰에 등장했겠지만 저는 그런 인물은 안 되는 것 같네요.
이 창업 경험을 통해 창업자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벤처 투자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은(또는 생각과는 달랐던)현실에 빠르게 지쳐갔습니다.
VC에 대해 가졌던 이상 또는 환상
이 회사는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회사이지만 또 하나의 스타트업으로서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 시험의 공간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사업하는 모습을 보면서 옆에서 간접적으로 느꼈던 희로애락으로 제 안에는 창업자에 대한 존중이 자연스레 자라났습니다. 사후 관리보다는 딜 발굴과 투자 심사의 비중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관행과는 다르게 창업자의 옆에 서서 그들이 성공적으로 사업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제 업의 본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여의도에서 커리어를 시작하였기 때문에 이런 말들이 허무맹랑하거나 아무것도 모르는 주니어가 내뱉는 순진한 생각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창업자들을 위한 선택을 해 나가는 것이 장기적으로 저의 내적인 성장과 부의 양적인 팽창에 더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또한 이런 활동을 통해서 창업자와 투자자의 이해관계를 정확히 일치시킬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돈을 외친다고 돈이 벌렸으면 모두가 부자가 되지 않았을까요?
펀드 공장장이 되어 버린 나의 현실
이런 생각을 실현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선 저희 회사 역시 추운 겨울을 이겨내야 하는 신생 회사에 불과했습니다. 이 시기를 겪고 장기적으로 살아남아야만 제가 생각하던 비전을 펼칠 수가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상품성있는 투자 기업을 찾아 LP들이 혹할 만한 펀드를 결성하고 이를 통해 AUM을 늘려 나가기 위하여 펀드 판매를 할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저는 제 이상과의 괴리감을 많이 느꼈습니다. 펀드를 결성하고 늘어나는 관리보수를 보며 느낀 감정은 뿌듯함이 아니었습니다(관리보수가 얼마 안 늘어나서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투자를 통해서 내가 얻을 수 있고 생태계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었던 제가 느낀 것은 오히려 허무함에 가까웠습니다. 저에게 단기적인 금전적 보상은 주된 동기 부여 요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빠르게 상장이 될 것 같은 딜을 통과시키는 것이 단기적인 성공을 가져올 수는 있어도 미래에도 같은 성공을 반복적으로 이루게 할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생존을 위한 펀드 결성 과정에서 저는 단순한 투자자였을 뿐 창업자들에게 어떠한 차별적인 도움을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스타트업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었나?
저는 돈에는 꼬리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돈을 받는 스타트업이 보다 차별적인 서비스를 제공 받아 더 큰 꿈을 꿀 수 있게끔 도와주고 싶었지만, 저는 바로 다음 펀드를 결성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신생 VC의 힘없는 심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웃긴 건 제가 위에서 말한 대로 창업팀의 옆에 서서 VC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그게 유의미한 효과를 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도 동시에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스타트업 생태계에 대한 존중과 성장에 대한 기여 등 개인 브랜딩 차원에서의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며 남들과 다른 척 하는 쿨병에 걸린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평소에 생각이 많은 편이 아니었는데, 이 업계에 들어온 이후에는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습니다. 이 업계의 의미에 대해서 스스로 충분히 설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고 블로그에 날이 바짝 선 글들을 썼던 것 같습니다. 성격상 아무 의미없이 무언가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과정은 필수적으로 겪어야 하는 경험이었지만 참 힘들기도 하고 생각이 많은 시기였습니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나이..?
제 나이는 포스팅 작성 시점 기준으로 일주일만 일찍 썼으면 만 31살이었을 텐데 아쉽게도 만 32살입니다. 그러니깐 이 회사 설립 당시 제 나이는 만 29살이었습니다. 30이 채 안 되는 어린 나이에 진입한 VC로서의 한계는 너무나 명확했습니다.
일단 먹고 살기 바빠서 펀드 찍어낼 생각만 하니 기존에 하던 방식의 투자만 하게 되고 새로운 재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만약 제가 다른 회사에서 성공적인 경험을 쌓고 창업을 했다면 이런 고민을 덜 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펀드 결성을 위해 필요한 LP 모집은 인맥 비즈니스의 정점에 있는 업무입니다. 시장이 어려울수록 오랜 시간 알던 사람에게 돈을 맡기는 게 그나마 안전한 선택이겠죠.
또한 창업자들에게 사업 기회의 확장을 위해 제공할 수 있는 산업계 네트워크도 전무했습니다. 창업팀들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물어보면 대부분이 '사람'이라고들 합니다. 이 점에서도 제 네트워크의 한계를 절감하였습니다.
리더는 새로운 문제를 정의하는 사람이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생존이 문제가 아닐 정도의 단계에서 시작을 했다면 적어도 제 생각과 일치하는 방법으로 성장 계획을 모색했을 텐데..주구장창 문제만 해결하고 있으니 미래 성장 전략이라는 말은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결국 이 회사를 스타트업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새로운 문제를 정의하지 못하고 기존의 방법을 답습하려 한 것이 가장 큰 패착이었습니다. "이번만"이라는 단어를 멀리 했더라면 참 좋았을 것 같습니다.
어린 나이의 VC 심사역이 생각해봐야 될 것
위에서 제가 겪은 문제들이 모두에게 해당되지 않겠지만 저와 비슷한 상황에 있으면서 VC 창업을 염두에 두고 계신 분이 계시다면 저는 조금 더 고민해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개인의 커리어 측면에서 VC는 종착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딜을 끌어오고 LP를 모집하는 펀드 업무와 스타트업의 사업 확장에 도움을 주는 일련의 사후관리 업무들이 꽤 많은 부분 인적 네트워크에 따라서 성과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물론 펀드 업무의 경우 정말 좋은 딜을 발굴하면 LP 모집이 생각보다 원활하게 될 수 있기 때문에 사후 관리 업무의 경우엔 생각보다 스타트업의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적을 수도 있습니다.
VC 창업을 꿈꾸거나 진입을 희망하는 이들에게
스타트업 창업 또는 경험 자체가 없는 상태에서 시작한 VC 는 알맹이가 빠진 커리어일 것 같습니다. 스타트업 경험 없이 스타트업에 투자한다는 건 다양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VC가 완전 초기 단계에 투자를 해서 회사의 속내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저도 이 회사를 운영하면서 느낀 것들인데, 진짜 상상 이상의 일들이 많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들이 외부 주주들에게 전달될 때는 정말 많이 가공되어 나가게 됩니다.
저는 이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발생하니깐 스타트업이고 그 가격대에 지분을 확보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이런 상황들이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이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지 못하는 VC는 스타트업에 정말 악마와 같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기업에서 항상 되는 것들만 보다가 잘 안 되는 것을 보고 "왜 성과가 안 나오냐"라고 다그치기만 하면 될 것도 안 되지 않을까요?
스타트업의 겉모습만 보고 투자할 게 아니라면 그들의 문화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그 씬에 일정 기간 몸을 담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예전에 막연한 생각으로는 VC로 일하다가 스타트업으로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게 참 어려운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외부인으로서 간접 경험만 할 수 있었던 심사역이 스타트업 생태계에 뒤늦게 진입해서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한정적이지 않을까요?
작은 실패와 더 큰 성공
제가 이번 창업을 통해서 이루고자 했던 바를 결국 이루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것은 참 어려웠습니다. 새로운 돌파구가 있지 않을까? 라는 답 없는 고민으로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경험이 제게 정말 실패일까에 대해서도 생각하였습니다. 제가 이루고자 했던 것을 내려놓는 과정은 힘든 일이지만 미래의 더 큰 성공을위해서 지금의 실패를 ‘작은’ 실패로 귀결짓고 더 큰 실패를 막아준 ‘성공’ 사례로 만들기 위해 앞으로 나아갈 생각입니다.
먼저 갑니다 - 따라오지 마세요!
그래서 저는 이 업계를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앞서 계속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지금 하기에 VC의 일은 한계가 있기에 제가 지금도 잘할 수 있는 일을 할 예정입니다. 언젠가는 제가 부족했던 점들을 보완하여 다시 도전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현재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VC로 전직을 한 후 업계에 관한 많은 비판 섞인 글들을 적었는데, 이제 이런 글들을 올릴 일이 없다니 시원섭섭하네요. 하지만 저 같은 이방인들이 업계에 많아져야 다양한 생각들이 오고가며 발전이 이뤄질 수 있다고 믿으며 저는 이만 떠나겠습니다.
이렇게 글 적고 블로그 기획 회의 때 숙제 검사를 받는데 동상이몽도 그만두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해서 한마디 보태면 동상이몽은 앞으로도 쭉 계속 함께할 예정이니 앞으로 업로드할 새로운 주제의 글들도 많이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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